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네이션 혁명 (문단 편집) === 혁명 전야 === [[포르투갈]]은 [[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]]의 독재 하에서 사회 분위기가 억압적이었다. 더불어 [[영국]], [[프랑스]] 등과는 달리 [[식민지]]를 포기하지 않고 계속 붙들고 있는 바람에 식민지 현지에서도 불만이 누적되었고 오랫동안 식민지와 [[포르투갈 식민지 전쟁|전쟁]]을 치르고 있었다. 살라자르는 [[1968년]]에 실각했지만 그의 뒤를 이은 카에타누도 근본적으로 살라자르의 정책을 계승하였다. 그러나 한편으로 살라자르 독재 치하의 포르투갈은 줄을 잘 타서 [[제2차 세계 대전]]의 화마를 피해갈 수 있었고 [[냉전]] 구도 하에서 철저한 [[반공주의]] 정책을 추진했기 때문에 [[NATO]]에 가입하는 등 국제적 고립은 피할 수 있었다. NATO에는 많은 포르투갈의 소장파 장교들이 교류 목적으로 파견되었고 이들은 서구 [[민주주의]] 국가들의 탈식민화, 자유화를 보고 자국의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에 회의감을 느끼기 시작했다. [[1961년]]에는 이미 독재정권을 뒤엎으려는 [[쿠데타]]가 발생했지만 실패했다. 더불어 오랜 식민지 전쟁으로 수많은 젊은이들이 [[아프리카]] 등에 파견되고 희생되면서 전쟁에 대한 회의감도 확산되었다. [[1970년대]]에는 상황수첩(Cadernos Circunstância), 시간과 방법(Tempo e Modo), 논란(Polémica) 같은 유인물들이 대학가에서 돌기 시작했다. 반전운동이 대학가에서 확산되었고 이스타두 노부 체제를 비방하는 선전물이 곳곳에 붙었다. 무장혁명행동(Acção Revolucionária Armada)이나 혁명여단(Brigadas Revolucionárias) 같은 [[좌파]] 무장 [[테러]] 단체가 조직되어 군 시설에 대한 [[테러]]와 [[사보타주]]를 감행했다. 오에이라스에 있는 NATO 사령부가 이들에 의해 공격당했고 탕쿠스(Tancos) 공군기지가 공격받아 군용 [[헬리콥터]] 수 대가 파괴되기도 했다. 카에타누 정부는 여론을 돌리기 위해 재정 정상화를 위한 군 예산의 삭감과 함께 여러 개혁 조치를 발표했다. 이 조치는 많은 장교들에게 불만을 샀는데 특히 출신환경이 좋지 않았던 젊은 [[장교단]]이 크게 반발했다. 동시기에 [[소련]]의 영향을 받은 포르투갈 국내 좌익 세력이 군부 내부까지 침투했고 이스타두 노부 체제에 불만이 많은 청년 장교들이 중심이 되어 군부 쿠데타를 통한 카에타누 정부 전복과 [[마르크스주의]]를 기반으로 한 신체제 건설이 논의되기 시작했다. 소장파 장교들뿐만 아니라 소수의 고위 [[장교]]들마저 포르투갈의 식민지 정책에 불만을 품었다. 일례로 장군이었던 안토니우 히베이루 드 스피놀라(António Sebastião Ribeiro de Spínola)는 자신의 저서 '포르투갈과 미래'(Portugal e o Futuro)에서 [[포르투갈 식민지 전쟁]]의 당사자인 [[기니비사우]]의 [[기니카보베르데 아프리카독립당|PAIGC]] 게릴라와 협상을 개시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했다. 카에타누는 깜짝 놀라 그를 해임했지만 스피놀라는 이미 식민지 전장에서 여러 공적을 세운 전쟁영웅이었으므로 카에타누 총리의 이 결정은 여론의 지지를 받지 못했고 전쟁이 싫었던 청년 장교들은 분노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